곰과 회당

폐간호 - 당신은 머리로 갔어야 합니다. you should've gone for the 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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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보수 폐간호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께

            감사합니다. 월간보수는 사회와 인간의 보수를 꿈 꿉니다. 
            또한 그것을 비열하고 속상한 일들과, 비열함과 속상함의 힘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룰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목차]
            
            1. Death Demona
            
            2. 닫힌정글/ 안티파워포인트/입의 이상함
            
            3. 실망한 망치/ 팬텀게인/NFT
            
            
            
            
            

1. 데스데모나: 저를 내일 죽이시고, 오늘 밤은 살려주시오.

Desdemona: Kill me tomorrow; let me live tonight

보라, 우리는 모두 구걸하는 자가 아니냐? For behold, are we not all abeggars? 모사이아서 4장 16절 구걸하라, 구걸의 힘(모든 직전의 순간에 삶을 연장하는 영원의 순간, 혹은 어떤 사람의 일상적 태도) 한 사람은 침대의 옆에 앉아서, 침대의 자리에서 침대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영원이 지나가는 순간을 기억한다. 여러분은 한 사람을 봅니다. 우리가 그를 보기 위해 그는 영원히 정지해있습니다. 모든 이미지의 경험에서, 여러분이 보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구걸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죽음은 내일, 오늘 밤은 살려주도록. 밤은 새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밤을 살아있기 위해, 살아있음을 밤 내내 느끼기 위해 우리는 잘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구걸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이의 죽음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아닙니다. 죽임 당하기 입니다. 구걸은 킬러를 위한 답변입니다. 킬러들은 관객입니다. 모든 구걸의 힘들이 우리가 감상하는 동안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구걸의 힘은 전염적이고 우리는 전염됩니다. 그래서 미디어는 항상 구걸의 장면을 아주 조금만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 “응급실에서의 120일”은 기이하고 풍성한 구걸의 장장 4시간의 퍼레이드를 펼칩니다. 120일동안 주인공은 긴 롱테이크 씬들 속에서 의사와 간호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응급실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회유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낙담합니다. 120일은 목숨을 구걸하기에 너무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응급실에서라면 다릅니다. 모든 도구들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걸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부패는 해결됩니다. 죽음의 사신들과 킬러들은 문 뒤에서 너무 오랫동안 서성입니다.. 이 예시에서 재빠르게 벗어나, 구걸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 관계들을 논의한다. 이미지와 대상은 구걸의 역학에 있어서 중요할 것이다. 구걸은 기본적으로 킬에 대한 것이다. 킬에 대한 답변이다. 그래서 그것은 귀엽고 비열한 것이다. 이미지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옷을 벗고 근육을, 뼈까지 드러낸다. 삶을 이행할수있는 어떤 종류의 행정 양식도 구비되어있지 않으며, 애초에 이 행정양식이 구걸을 위해서 구성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수치심, 명예, 수치심에 따른 자살이라는 방식은 따라서 구걸의 관점에서 볼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해보인다. 즉, 구걸하는 자들은 명예있는 자들보다 더 명예롭다. 구걸은 킬러에 대한 것 뿐만이 아니라, 물론 킬러가 관객이기에 관객도 킬러라는 가정하에, 죽이기에 대한 공적 논의이다. 예를 들면, 음악, 음악은 구걸하는 목소리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뼈를 울리는 소음들이 우리를 소름돋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죽음을 거부하는 진동, 죽이려는 자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회유와 겁박으로 시간을 지연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음악들도 이러한 관점의 이동으로 일단 그것들을 속으로는 귀엽고 재치있는 것으로 입막음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일은 우리를 멍청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떤 음악들을 들으며 헤진 외투와 신발을 신고 모자도 없는 채 길거리를 나갈 수 있다. 그것도 새벽에, 아직 추울 때. 하지만 일단 이 지면의 관심은 미디어라고 불리는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에 몇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우선 우리는 이미지 속에서 구걸을 느낀다. 이 퍼져나가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동정심, 우리를 감싸는 심오하고 우주적인 감정들, 그것은 죽이기 앞에서 죽기 전까지 지내야 할 이동 숙소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일 것이다. 총알이, 칼이, 폭탄이 우리에게 전진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이 도달하기 한 컷 전, 한 씬 전, 한 프레임 전,.. 한 회차의 전,... 모든 시간의 분할된 영원 사이에서 우리는 돌바닥 아래에, 독립 병실의 한 의자에 걸터 앉고, 그 사이 동안, 아주 조그만 시간(혹은 영원)을 지낼 장소를 찾고 계획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데, 우리는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아무튼 잠시 우리 거처에서 나와서 일이 일단락 될 때 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갈아입을 옷 몇가지와 음식 조금, 읽을 거리만을 챙긴 채 어딘가로 서성이거나 어딘가를 찾아서 어떤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아예 떠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저 킬이 일어날 순간, 그것이 누가 되었든,,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니니까. 죽음은 우리것이 아니다. 구걸은 우리것이다. 구걸만이 우리것이다. 침대에 아픈 누가 누워있다. 그게 누구인지는 까먹었다. 그가 수술이든 무언가를 위해 떠난다. 영원이 기다린다. 모든 곳이 호스피스다. 밤은 없다. 당신이 깨어있다면, 매일은 매일과 밤은 다시 온다. 내일은 없다. 밤이 없다면.. 그러나 이제 현대의 구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단 구걸하는 길거리의 사람들과 대규모 구걸 등에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우리가 파산하고 거리에 나앉아서 구걸하면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일단 많은 구걸하는 사람들이 납치되고 테러당하거나 목졸라 죽었다. 이는 구걸법에 저촉되는 일이다. 따라서 당국은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장님이 아닌데도 장님인 척 하는 사람들, 다리가 있는데도 가려놓은 사람들 등을 비난하는 것도 지양하는 팻말을 걸어놓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끝이 가깝다The End is nigh”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정말로 끝이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그렇고 아는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 부터 모두 알았습니다. 정말 끝이 가깝습니다. 우리는 어서 구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구걸의 기술, 서로에게, 누구에게, 어떻게. 이미지들은 답을 보여줍니다. 이미지들의 회고적이고 그래서 근원적인 미학에서 우리는 이미지들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거기에 있는 채로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 만으로 우리를 비참한 존재로 만듭니다. 이미지 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그렇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며 우리의 마지막 친구들입니다. 우리가 외면하지만 이미지들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절멸과 구원의 구조들을 내심 상상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들은 자아와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과정들보다 먼저 있어서, 구걸의 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이미지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가장 마지막 순간의 우리들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의 우리들의 이미지가 지금의 우리들에게 이미 있어서 그것에 의해 역으로 우리가 구성됩니다. 우리는 모두들 호스피스 병원에 모여있습니다. 익숙한 얼굴들로 가득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상들을 확인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상상이 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멈추려 하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그곳에 도달하고 싶어합니다. 영원의 감각은 최후의 구걸의 감각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호스피스에 있지 않더라도, 이미 그곳에 서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오늘 밤은 살려주시오. 그러나 곧 모든 호스피스에 대해서 세계정부의 지원이 중단될 예정입니다. 곧 그렇게 됩니다. 모든 호스피스들, 어떤 품. 자비로운 총구의 정지. 모든 것들이 사라집니다. 예산이 부족합니다. 예산이 부족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원을 획득해야 합니까? 영원이 문제이긴 합니까? 킬을 집행하는 자들이 말합니다. 구걸에 대한 항목에 대해서 예산이 중지되었습니다. 이제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 뿐만 아니라 구걸에 대한 항목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구걸은 이제 식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지의 소멸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합니다. 저 사람은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야. 왜냐면 우리는 구걸이 가능하다는 것을 빠르게 잊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줄 권리도 받을 권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호스피스들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미지의 호스피스는 폐허가 된 것 뿐만 아니라 의자에 스파이크가 있는 공원으로 재편성되었습니다. 모든 시한부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우루루 흩어져 나옵니다. 호스피스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등재되어야 할 서류도 사라졌습니다. 이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호스피스가 사라진 세상에서 공백의 이미지들을 봅니다. 사진은 있지만 명명될 수 없고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의 달성이 이미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져서 구걸 또한 사라졌기에 호스피스도 사라졌고 호스피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왔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달성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도 없게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졌고 빠르게 지나가서 인간에게 그것은 더이상 중요한게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런것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마지막의 순간에 우리가 구걸할 수 있어서, 구걸할 수 있는 모든 환경들, 라이벌들, 모험들, 아치 에너미, 뒷세계 청소부, 치정과 테러, 실종,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우리가 구걸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던, 우리는 구걸을 할 수 가 있어서 그 순간의 영원을 선취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구걸의 힘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요? 최대한 속상해하기로 합시다. 최대한,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질투하고 원망합시다. 모든, 저 사람이 들고 있는 샌드위치가 부럽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길거리에서 미친 사람 처럼 외쳐야 합니다. 우리가 미친 사람처럼 굴면 사람들이 우리를 목졸라 죽일 것입니다. 그들이 구걸의 이미지, 구걸을, 이미지를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단과 무대와 소품들과 배우들을 대동하고 다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목졸라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연출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목졸라 죽이려 할 때, 우리는 어떤 때보다 더 명료한 정신으로, 아름다운 쉰 목소리로, 악단은 음악을 연주하고, 소도구들이 적절히 배치되고 날씨또한 웅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그 모든 연유와 평생을 고려하더라도, 내일 저를 죽이시고, 오늘은 살려주시오. 우리는 영원과 구걸과 이미지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모두 하나하나 목졸라 죽입니다. 대출금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절멸 당했기 때문에, 산소 호흡기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최후의 복압 때문에 배의 구멍에서는 소화되지 않은 유동식이 흘러내리고 대소변을 지리고, 눈을 부릅 뜬 채로 거품을 물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구걸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리 구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이미지를 붙잡아야 합니다. 혹은 한숨 자고 나서, 다음주에 해도 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들의 상생하는 극단이 있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입니다. 극단이 있는 것 만으로 얼마나 좋습니까? 눈물 날 정도로 좋은 일이고 오로지 그것만 있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 같이 구걸하는 극단, 애초에 극단이 구걸을 안 해도 될리가 없습니다. 극단들은 언제나 구걸하고 있습니다. 왕창 구걸합니다. 사람들이 구걸하는 사람들을 단죄한 역사가 깁니다. 최후의 순간에 구걸하는 힘을 안그래도 피곤한 모두에게 남겨줍시다. 오로지 서로 구걸하는 순간 멋지게 도와주기 위해 함께 극단을 꾸립시다. 그러지 않아도 되고. 구걸의 또 다른 힘은 대등하게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아직도 할 말이 있습니다. 구걸은 구걸이라는 세계의 진실 속에서 그 상황속에 들어온 사람들을 결속하게 만듭니다. 그 곳에서는 평등이 있습니다. 왜냐면 실제로는 속으로는 비열한 정신을 갖고 있고 오만한 상황에 놓여있는 어떤 사람들이 구걸의 진짜 의미에 대해서는 사실 영원의 체험속에 공존한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걸 이후에 사람들은 어느정도 가족이 됩니다. 가족들은 서로 구걸하기도 하고 절대로 안하기도 하는데 둘은 비슷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미지는 어떻게 연관됩니까? 이미지가 가능하다는게 무엇인가? 이미지가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게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구걸의 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일, 그러한 상황에서 이미지는 작동한다. 우리가 구걸하는 것을 잊는다면 이미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지는 영원의 감각이며, 구걸을 멈추지 마세요. 구걸하세요, 당신들은 구걸할 때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스러워 질 때 까지 계속 구걸하십시오. 당신들이 구걸하는 것이 보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모두 구걸하는 것을 보고왔습니다. 당신 자신들을 위해, 당신의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위해, 모든 쓰러져간 사람들을 위해, 구걸할 수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을 위해, 구걸을 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모든 죽은 사람들을 위해 구걸하십시오. 앞으로 살 사람들, 미래의 사람들, 아이들을 위해 구걸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당신들을 위해 구걸하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모든 폐기물들이 승리해서, 우리의 모든 손가락들이 썩은 나무처럼 겉은 바싹 말랐고 안은 흙으로 가득합니다. 호스피스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구걸하는 사람들의 손가락들이 바닥에 낙엽덮인 산속처럼 깊이를 모르는 채 바스락 거리고 있습니다.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든 멍청하고 못생긴 어린이들이 스톰프 되었습니다. 그들을 다시 괜찮은 모양으로 만들어주세요.

2. Oubliette

파시즘이라던가 하는 이름의 것의 도래가 문턱까지 왔습니다. 모두 멍청한 모바일 게임의 캐시템들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의 이름은 카메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 깊이 카메라를 혐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나 좋아하는 척 하는 것 뿐입니다. 아무도 카메라를 주고 눈 대신 사용하라고 해봤자 그렇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고 싶습니까? 카메라는 우리가 실패를 공고히 실감하도록 하는 함정일 뿐입니다. “...” 특히, 우리가 보는 것들은 모두 졸도의 감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졸도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간수 : 우리에게 즐거운 나날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에게는 굴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길고 차가운 돌벽으로 된 수직 5미터의 감옥. 거기 당신의 친구들이 이미 모두 와 있습니다. 농노: 이쪽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오솔길이 있고, 반대쪽에는 잔치를 벌이는 시장이 있습니다. 제 손에는 가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빵과 잔치에서 팔 생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차가운 벽돌로 된 수직의 구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닫힌 정글 Closed Jungle

근 시기에, 전자 도시가 생성될 때, 작은 건물들 사이로 좁고, 아직 단열환기 시스템의 한계와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을 때 학원과 사무실들 공공기관들의 복도와 방들사이로 불안하게 묻어나오는 잉크와 뜨거운 종이들이, 복사하는 불빛들(그때는 그것은 위험한 인상을 주었습니다)이 먼지들과 열기를 한데 모아 대기를 형성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몽롱한 얼굴로 단어를 외우고 있지만 프린터기의 소음에 점점 의식을 잃는다. 열기와 안개의 모호한 최면걸어오는 공간을 걸어다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작은 정글을 사랑했다. 그 당시에 정글들은 아직 닫혀있었고 뜨거웠으며 우리의 몸들은 출처와 품질이 의심스러운 재질의 긴 옷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언어들은 아직 종이 위에 잘 간직되어 이동되고 있었고 말들은 녹음기에 다 담기지 않았다. 닫힌 정글은 학교, 복합 체육관, 패밀리 레스토랑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반지하 싸구려 임대 사무실, 상가의 간이층에 있는 보조학원, 수상한 개척교회 경비실에 있었다. 그것들의 정글성은 불미스러울수도 있고 시대에서 아직 그 진가가 판명되지 않은 종류의 노동들과 숨소리들의 생태계를 그 곳에 고정시켜서 어떤 의미로는 그 안의 삶들을 보존시키는 역할을 했다. 닫힌 정글들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닫힌 정글은 몸과 언어들과 그것들의 복작거림의 냄새와 무게와 열기가 안에 닫힌 채로, 간간히 스며나오는 형태로 그 안에서 오랫동안 축적되어 가구에 스미고 뼈에 삭이는 일들을 말한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은 어떤 빌딩의 옥상에 붙어있는 청소부용 거주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살았다. 그 사람은 항상 거기에 고용되어있던 것은 아니였다. 빌딩에서 나오는 열기가 건축상의 문제로 항상 그 방을 통과해 나갔고, 빌딩의 배설된 영혼이 항상 그 사람을 구름처럼 둘렀다. 그 사람이 결국 병원에서 보험에 해당하지 않는 원인모를 질병으로 고통받다 사망하던 날, 빌딩이 무너질수도 있었다. 다만 어떤 방들은 너무 넓거나 환기가 잘 되는 것 같아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러나 컨테이너 창문 앞 쌓인 재고들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날에는 먼지들이 광선 속에서 우리를 눈물흘리게 하고 벽에는 밀폐된 곳에서 분진 폭발로 불에 그대로 타버려 그림자가 된 사람들의 손이 우리를 어루만진다. “끊임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층계 속에서, 나는 탑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jacob galler 닫힌 정글은 우리를 부른다. 우리가 헛된 회사의 헛된 사무실에 고용되어서 모두가 헛된 일을 하러 나가고 우리는 당직 근무를 하면서 그날은 아무런 두티도 없이 그저 꽉 막힌 휴게실에 누워서 고장나고 먼지 가득한 공기청정기를 믿어보면서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서 누워있을 때, 우리가 닫힌 정글을 형성하고 잔뜩 눈물을 흘리면서 누워있을 때, 그 때 우리는 거기에서 완전히 곤죽이가 된다. 그런 곳에서의 잠은 낮도 밤도 없이 15분 간격으로 여러번 지속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 곳을 나왔을 때, 우리는 두배 정도 빨라진다. 그러나 우리는 10시간 이상 그러한 곤죽이 상태로 있기 전에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후회의 불안한 심장박동과 가루가 된 눈물과 함께. 그러나 우리는 닫힌 정글 속에 있었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끈적하고 느긋하고 눅진한 추억을 준다. 특히 정글에서는 언제나 어떤 것들이 숨어있다. 그것들이 거기에 숨어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분좋은 두려움과 안도를 준다. 우리에게 닫힌 정글 같은 기술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자명하다.

안티 파워포인트 Anti-powerpoint

파워포인트에 대한 힘의 상상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면서, 저는 의심스러움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아이폰, 일론 머스크, 이라크전쟁, 그린마일리지에 대한 수상하고 패배주의적인 관심과 같은 무수한 흐름의 창발지이자, 근본적으로는 설득과 제안의 판타지의 근간을 이루고 연료를 부어주는 시뮬레이션 포맷에 대해, 일단은 그것의 태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퇴폐적이고 사치스러운 기본 구조나 그것이 수반하는 부차적인 장르들의 변태적임을 쉽게 인지하지만 변태성의 효율적 변모에 대해 쉽게 눈감아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고, 슬라이드가 넘어갑니다. 자료들이 제공됩니다.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어떤 경우 바닥은 카펫이 깔려있고 천장은 홀이라서 매우 높습니다. 보통은 싸구려 가습기를 잔뜩 틀어놓은 축축한 사무실 안 입니다. 파워포인트는 우리를 언제든 스위스 부자들 처럼 느긋하고 권태롭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제안의 가능성과 욕망이라는 힘의 우리를 실재와 분리시키는 힘이 우리를 망쳐spoil놓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더 이상해질수도 있습니다. 일단 단순하게 생각해서 파워포인트라는 일의 역사의 범위를 벽화같은 것에서 시작해서 미래의 가능한 인터페이스에까지로 그리면 어떤 계보와 궤적을 그릴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파워포인트의 마음은 워프 터널같은 것이 됩니다. 슬라이드와 다음 슬라이드의 사이에서 이미지는 가속화 하고 동시에 내로우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파워포인트적인 것에서 어떤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것은 처음에는 가속주의의 어떤 한 형태처럼 보입니다. 가속주의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어떤 너머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화면으로 만화를 보는 것같이 졸도하는 감각입니다. 파워포인트는 우리의 가속하는 힘을 졸도하는 힘으로 변환해내는 기계입니다. 여러분은 졸도하는 것이 좋습니까? 파워포인트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설득합니다. 졸도하고 나면 우리는 졸도하기 전의 것들을, 이전의 것들을 거기에 놓고 더이상 기억할 수 없습니다. 가속주의가 도달하려는 진정한 것은 모든 망가진 집들과 뼈들과 시체가죽들의 정글을 파헤치고 기어가서 모든 섬유질들이 우리에게 달라붙은 채로 모든 것을 질질 끌고가서 도착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파워포인트 하지 않겠다, 하고 선언해도 우리는 더이상 졸도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저의 머리는 여러번 졸도하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더이상 어떤 사람들의 얼굴도 냄새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졸도는 일단 삶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또한 졸도의 길 속에 어떤 종류의 가속주의의 힘이 살아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대가리를 땅바닥에 제대로 처박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른들은 그러지 말라고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파워포인트의 세계라는 피폭을 이미 입었고, 어떻게 해야 피폭자들이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입의 이상함

입이란 것은 굉장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입은 그냥 거기에 있는데 어떤 것들보다도 크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거기에 아주 오래전 깊이 들어가버려 죽었을지 모르는 어떤 사람의 몸뚱이가 들어있습니다. 커다란 상처, 동굴, 감옥, oubliette가 있고 그것이 아주 깊고 가장 깊은 것일까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어떤 것보다도 입은 가장 잘 움직입니다. 그러나 입은 열려있고 유체역학의 신비에 의해 모든 것들이 자동으로 지나다닙니다. 안개낀 먼지 같은 것들 속에서 우리는 어째서 입이 열려있는데도 우리가 이 모든 것들과 하나가 아니라 구별되고 있으며 우리의 내장이 이미 그러한 먼지들과 같은것이 되지 않았는지 걱정합니다. 쓰레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갑갑하기 때문에 마스크같은 것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쓰레기같은 것이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코가 막혀있기 때문에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쏟아지는 차가운 물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코의 숨쉬는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코가 막힌 사람들은 모두 기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기억의 흥분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코가 막힌 것입니다. 기억들과 함께 숨을 한 껏 들이마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들은 모두 공기 중에서 들어옵니다. 입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입만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입은 냉혹하고 쓸쓸한 것입니다. 입은 하드보일드 탐정 같은 것일 것입니다. 입은 이미지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두려운 선생님 같은 이것이 이렇게나 차가운 것일 때 우리는 좌절과 낙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에게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가족은 아닌 것 같은 속상한 관계에 빠집니다. 우리에게 입 안으로 들이는 것은 중요한 것이기에 이미지가 먹을 수 없기에, 우리 안으로 끌여들여 영원히 추락시키고 우리의 죄수로 삼을 수 없기에 속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 속에서 우리는 이미지를 외부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입을 열수도 있지만 다물수도 있습니다. 입이 다물어져 있다는 것은 눈이 감겨있다는 것 보다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입이 다물어져있다는 것의 영원한 미스테리가 우리에게 영원한 환상을 제공합니다.

3. Broiler

실망한 망치 : 호밍기를 회피하기

두 노동자가 시티shitty한 환경에서 공사를 한다. 너무 가까이서 안전모를 쓰지 않은 망치가 휘둘러지고 망치는 머리카락을 스치며 떨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기묘하게 웃는다. 망치는 실망한다. 수많은 기회와 실망들이 휘둘러지는 망치 속에 숨어있다. 순간의 심연 속에 모든 것들이 휘몰아친다. 일종의 공적인 자원인, 도시인의 일상적 공회전이 모바일 게임의 창궐로 인해 속속들이 폐지되었다. 호밍homing이란 주로 게임에서, 회피의 조작에 따른 성공률을 제어하는 공식이다. 즉 호밍 수치가 100%라면 절대로 어떤 공격은 회피될 수 없고, 0%라면 무조건 그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이 일상적 인터벌들에 적합하게 달라붙기 위해 최소화, 경량화되면서, 이러한 호밍 시스템의 다변화는 중지되었다. 즉 호밍하는 과정 중의 포스트-인터넷적인 공회전은 또다른 유물이 되었다. 게임의 역사(혹은 사냥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중간단계인, 타격의 성공 유무를 판별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기대와 탄성은 도약의 시도에 필요한 잔근육들을 기르는 자잘하지만 중요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기능들이 경영 계획적으로 누락되게 되었고, 사실 그렇게까지 필연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호밍은 많은 단계들과 기획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호밍기는 우리에게 달라붙는다. 이는 재질들의 관계와 역사들을 재편성해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호밍기를 재논의하는 과정은 우리의 모든 산재와 공포들의 스릴감과 망치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팬텀 게인

팬텀 게인은 누군가가 투자로 인해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경제 용어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손실 이후의 환상통을 의미하는 팬텀 페인의 반대항인 다른 말에 대한 것입니다. 팬텀 게인은 얻을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내적으로 구성된 획득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갖고 있다고 실감하는 것들에 대한 이상한 환상일 수 있다. 팬텀 게인은 확실히 실망감과 관련이 있다. 근데 그것은 이미 실망한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갖고 있다고 실감하는 환상에 대해 다시 불러일으켜지는 획득에 대한 감각이다. 즉 이것은 획득에 대한 실망감이다. 획득이 충족을 주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실망감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다시금 획득해야 한다는 당혹스러움과 부담감에 대한 호흡곤란일까? 개별적인 몇가지 기관들의 부재에 대한 것인 환상통과는 다르게, 팬텀 게인의 주체에게 본래 있어야 할 신체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사지와 같은 것이다. 무한한 사지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것들은 좁은 지역의 나무들처럼 엮이고 엉키는데, 나는 그것들이 중요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쓸모없는 스트레스를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실망감의 파생실재와 파생효과들을 계량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NFT : No Family Trip

삶의 어느 시점에서든, NFT의 순간이 도달합니다. 더이상 가족 여행은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4.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