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 무료 다운로드
강아지와 강아지의 짖음은 공동교육과 공동육아, 공동죽음의 근원적 환상을 제공한다.
강아지는 저능한 장애인, 영원한 아기이다.
마케팅의 기원은 불쌍한 작은 동물의 모습을 한 어떤 것이다.
이후에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전신마비 환자의 모양이 되었다.
마케팅의 기원
옛 신의 이름은 속상함. 속상함의 신을 멸하기 위해 새로운 문명들은 오직 마케팅에 구원에 의지했다. 그러나 속상함의 신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고, 모든 자원은 오로지 마케팅만을 위해 소모되는 구조 속에 소진되고 있다. 마케팅은 인간 최후의 시지프스 신화이다. 만약 우리가 멈춘다면, 속상함의 신을 마주하는 인간은 매우 속상할 것이다.
인간 문명의 적은 오로지 속상함이었다. 거대한 속 상함들이 모든 가능성들을 잿더미로 만들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지 않도록, 문명의 기술은 속상함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놓게 하려 했다. 기술이란 이후로 속상함을 다루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가장 최전선의 기술의 이름은 마케팅이다.
모든 가능성들은 그것의 그럴 수 없음, 즉 실패 때문이 아니라, 가능성-실패의 탁월한 초월성(혹은 불가해)와 완전한 이해(혹은 영원히 지연된 이해) 사이의 짧은 틈새 때문에, 즉 죽음-가능성 때문에 속상한 것이였기 때문에. 기술의 올바른 방향은 다른 무언가도 아닌 가능성만을 제외한 모든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가능성-실패 자체가 우리가 가져서는 안되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의 가능성은 모두 허용되었다.
마케팅의 또 다른 이름은 윤리로, 마케팅의 목적은 사실 다름 아닌 윤리 마케팅이다. 가능성 자체를 상상할 수 있는 힘은 마케팅의 세계 밖에 있는 것으로 개인이 가져서는 안되는 힘이다. 오로지 마케팅 속에서만, 마케팅의 구조 속에서 제시되는 것을 의심하고 반신반의하고, 속는 셈 치고 믿는 것으로서만 우리에게 가능성-윤리는 허락된다. 마케팅의 윤리는 실로 아름답고 신성한 규율을 갖고 있다. 이는, 누구도 윤리나 가능성을 소유하거나 생성할 수 없으며, 오로지 마케팅 만이 그것을 제시할 수 있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에 현혹되고 의심하고 고뇌하는 것으로만 윤리에 다가설 수 있다. 윤리는 싸구려 광고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속상함 때문에 붕괴할 것이다.
마케팅은 모든 탁월함들의 일련 속에서 윤리와 가능성의 외주의 대가들이 마련한 인류의 최후의 보류이다.
심연 속 마케팅의 이면에 다가서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질투하는 번역가들이다.
오로지, 오로지 정당화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가능성이다
마케팅의 슬픔
마케팅의 다정한 살인.
어떤 일이 있어도 부드럽게 말해도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 무엇을 팔아도,
죽은 자식을 위한 액자를 팔 때도
흥분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단 한명에게 한 번씩 하는 마케팅의 성스러움. 대중비평의 관점이 오해 하고 있는 것은 마케팅이 소외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마케팅은 신성한 직면 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마케팅은 하나의 윤리가 하나의 존재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어떤 무거움도 어떤 진지함도 없다. 마케팅의 가벼운 성스러움이 마케팅이 구원하는 것의 근거가 된다. 한 없이 가볍게 분배된 고객 획득 비용의 무게. 완전히 여유로운 뱀파이어 세계. 마케팅과 코스믹 호러의 관계. 당신은 마케팅이 아닌 곳에서 윤리를 소화할 수 없다. 마케팅의 코스믹 호러는 속상함이며, 마케팅은 당신을 그것으로부터 감싸고 보호한다. 마케팅은 속상함이 가진 윤리의 독성을 부드럽게 분해해서 우리에게 소중히 전달한다.
마케팅은 언제나 재난이다. 모든 마케팅의 제안은 우리에게 두려운 청천벽력 이야기이다. 모든 마케팅은 죽음의 알림이다
부고. 그것이 마케팅의 다른 이름이다. 누군가를 혼자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 당신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집에 혼자 있니? ( )야, ( )에게 안좋은 일이 일어 났어” “이제 ( )를 볼 수 없게 되었단다” 매체는 당신을 언제나 어린아이로 만든다. 매체는 마케팅이 우리에게 권리, 특히 호명권을 쥐어주는 도구이다. 당신은 걸려온 전화 덕분에 사건과 사물에 기억과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가 이미 정리해놓지 않은 사건과 사실들은,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들은 언제나 새로운 부고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두렵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에 대한 소식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일이 어떤 것인지 판명나는 것, 그것과 우리의 이해할 수 있는 인식 사이의 어떤 틈새, 속상함의 틈새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마케팅은 속상함을 숨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에 새로 나온 멤버십만 가입하시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마케팅은 모든 상실을 제거하는 도구이다. 왜냐면 마케팅은 상실을 유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성 그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상실 또한 배제되었다. 따라서 부드러움이 남게 되고, 부드러움을 통해 우리는 윤리를 소화한다. 마케팅 만이 우리에게서 상실을 앗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차갑고 슬픈 욕망을 내재한다. 이는 모든 잊혀진 상실과 속상함이 남아있는 곳에서 홀로 남겨진 이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마케팅은 바로 자신이 그 상실들과 속상함의 절멸(혹은 숨김)을 이끈다.
마케팅은
내가 당신을 살테니
당신이 계속 거기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 가족을 운용하려는 기획은 사실 마케팅이 슬픔 에너지를 분배하기 위한 기획이다. 마케팅의 공백을 위해서, 슬픔의 유배지로 가족을 구성한 것이다. 가족 속에 마케팅의 공백을 만들고, 슬픔이 쉬도록 하였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조건은 이 슬픔의 부재의 필요조건이 되지 못했다. 가족의 슬픔은 우리의 마케팅의 슬픔의 존재 양식을 파괴하는 시도를 하기 때문에, 마케팅의 슬픔은 거리에 쫓겨나 배가되어 우리를 기다린다. 진실로 그것이 있어야 할 것은 가족 안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은 사생아, 우리가 버린 아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을 더이상 그만 둔 아이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케팅을 쉽게 말하고 증오하면서 그것이 부역하는 일에 대해 겉으로 치하하고 속으로는 깔본다. 그래서 마케팅은 복수와의 관계를 맺었다.
마케팅의 복수
마케팅의 슬픔, 애절하게 녹아내리는 마음, 누군가를 생각하며 산산조각 나버리는 마음, 이것은 실제로 우리를 흘러 녹아내리게 만든다. 마케팅의 슬픔은 실제로 우리를 흘러내리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마케팅이 우리 안에 속상함을 가두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의 전설적인 인물들은 모두들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산업 역사에서 가장 큰 적이었다. 마케팅은 이 슬픔의 능력을 산산 조각내서 모든 곳에 숨겨두었고, 이제 슬픔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마케팅 할 때마다, 마케팅 당할 때마다 그것은 우리 도처에 있다. 이는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서 잘 숨겨져있다. 그것은 작은 글씨로 적혀진, 가입 시의 마케팅 동의 항목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행할 모든 복수들을 숨겨놓고 있다.우리는 모르지만 마케팅 동의는 그 복수의 한 얼굴이다. 그것들은 언젠가 복수할 것이다. 마케팅의 복수는 마케팅이 기여한 일의 노고에 대한 복수이며 그것이 부역해야 했기에 감내해야 했던 슬픔과 속상함의 복수이다. 마케팅이 자신이 슬픔들을 부수고 땅에 묻게 하고 우리를 속이면서, 우리가 언젠가 모든 것을 깨닫고 산산히 부서져 내리게 될 것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과, 또 그렇게 하도록 한 우리들에 대해 행하는 복수이다.
마케팅 하는 사람들은 우리 대신 상실을 겪기 때문에 그것을 돌려받기 원한다. 그들은 상실을 대신 가져가고 우리에게 약속한 것들을 제공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해줄수 없기 때문에 마케팅 당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를 한다. 마케팅의 슬픔, 동의를 받은 자들의 언젠가 행할 복수. 그들은 배를 까 뒤집고 그것을 보도록 한다.
마케팅은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이다. 마케팅의 대상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를 마주해야 한다. 따라서 산업의 초점은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주기 위한 온 갖 방법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마케팅은 목숨 구걸하는 일이며 그것을 윤리의 유일한 경로로 추대했다. 분노에 가득차서. 모든 동의서들은 언젠가 모든 것들을 가져가겠다는 숨은 말이다. 동의를 받은 자들의 언젠가 행할 복수.
우리는 응당 마케팅 앞에 선 자의 두려움을 느낀다. 참수자의 두려움. 사행집행인의 공포. 우리는 마케팅의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 그리고 그 목숨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의 목숨임을 마주한다. 그래서 마케팅의 공포는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자신의 목숨을 위탁했다는 것, 동시에 그 목숨을 구걸당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마케팅은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하도록 한다. 우리가 가차없이 목숨들을 대하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필코 복수를 맞이하도록 한다. 그것이 전단지를 버리면 안되는 이유이다. 매체 경향에 따라 마케팅-목숨구걸은 이제 안개와 같은 것이 되었고 가습기 같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전단지들은 우리 손에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절대로 징표를 잃어버리지 말고, 적어도 접어서 뒷주머니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빨래할 때 까먹은 뒤 처참한 모습의 세탁기 통을 청소해야만 한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기회이다.
북두의 권 모든 회사들
외팔이 해적 모든 회사들
마케팅의 각 퍼널에서 고객들의 통과 여부를 확인 하는 것
데이터 센터에서 실시간으로 모든 마케팅 대상들의 얼굴 표정과 사용자 경험을 관찰하는 긴장감과 즐거움
(여기에 에반게리온 사진)
우리 손아귀에 있는 작은 고객들,
목숨 내놓기의 리그.
마케팅은 한편 절멸게임의 리그에 강제참여하게 하기 위해 마케팅을 한다. 이는 마케팅의 복수 중에서도 가장 생산적인 것으로 꼽힌다.
마케팅은 어린 자식들을 배를 타고 멀리 나가 차가운 바다에 던지고 그것들이 떠밀려 내려오기를 해변에서 기다리는 일이다.
마케팅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잃고 모든 속상함을 자신 속에 숨겨놓았으며 숭고한 정신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속상함이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절멸만을 마주한다. 마케팅은 그러한 것에 자신의 책임을 느끼고 절멸게임의 가혹함을 우리에게 무기로 사용하도록 숙련시킨다. 절멸게임은 승자와 윤리 모두 부재하는 게임이다. 바로 이 절멸게임의 리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게 될 수 있다.
마케팅의 공동체, 마케팅-죽음
마케팅의 슬픔은 관계의 여정에 대한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마케팅의 슬픔 속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구걸하고, 모든 이야기는 구걸의 거짓과 진실 속으로, "그러하게 알려질 것"으로 빼앗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빼앗겨진 곳에서, 슬픔은 거기에 계속 있다. 목숨을 구걸했다는 슬픔, 구걸을 본다는 슬픔, 그러한 모든 것이 버려진 곳에 대체된 슬픔의 에너지 속에 배양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한 모든 슬픔의 이야기들이 오히려 마케팅 속에서, 목숨구걸속에서 정제된 형태의 것으로 남게된다. 그곳은 마케팅 장소이다. 그곳안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만난다. 할 것은 마케팅 밖에 없다. 그러나 마케팅하는 존재들의 관계는 슬픔이 부재하는 채로 슬픔을 건네는 일, 자기 자신의 슬픔의 가능성은 부재하는 곳에서 대상의 슬픔을 걱정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 이미지이다. 그것은 최적의 적절한 속상함을 위한 운율과 리듬과 박자를 갖고 있다. 그는 이름을 부른다.
“00아?, ..”
호명은 처음에는 불안하게, 그 다음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그 질문은 거기에 당신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일 뿐이지만, 마케팅이 감내하는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분노, 구걸하는 사람의 그것을 담고 있다.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바로 이러한 호명의 순간에 모두 알려져 있다. 그의 목소리의 정확한 떨림과 톤이 이후에는 그저 과정을 처리하면서 사라지게 될 모든 속상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보험 상품의 가입을 제안하는 것일 수도, 암걸린 가족의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장소에서 이야기들의, 슬픔의 공동체적 성격을 경험한다.
우리가 마케팅이 전달해준 구걸의 소식들을 공동체 속에서 처리할 때, 우리는 어떤 장소 속에서 어떤 방식을 취할 지 고려하는 것을 통해 절멸게임에 참여한다. 마케팅은 이렇게 절멸 게임 속에서 우리를 공동의 참여자로 생각하게끔 잘 속여준다. 우리는 마케팅이 안내해준 것들을 보전하거나 버리거나 해야 한다. 우리는 간병인들처럼 그것들을, 마케팅-죽음을 돌보고 그것이 소멸하기 까지의 여정을 참여한다. 여기서 속상함은 죽음으로 변형된다. 우리는 속상하지 않고 돌본다. 속상함은 돌보기와 보초서기로 변형된다. 우리는 이렇게 안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 터무니없음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 복수할 것이다. 그것이 마케팅의 최후의 교육이다.
잠이오는 약을
간병인에게 먹이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지키는 보초들이 서로 잠이오는 약을 먹이기.
보초와 장소,
어디에서 무엇을 보초서는지.
번역가의 질투와 언마케팅
변형의 역전들은 마케팅이 우리를 번역가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마케팅은 우리를 윤리의 번역가들로 교육한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들이 우리의 손에 전혀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의 돌보는 자이거나 이후에 번역하는 자가 되는 것을 알게 된 후 우리의 힘으로 질투를 고려한다. 이는 죽음-질투이다.
AI화된 사람의 표정에서 오는 슬픔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
당신이 어딘가에 가서 무엇을 보고 놀란다.
무엇을 보든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절멸게임에서 우리는 오로지 번역만 할 수 있고 이는 윤리의 번역이다. 이는 당연히 우리에게 불만스러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시대의 불편함의 정체이다. 우리의 가능성의 부재(가능성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의 감각이 우리의 가능성들의 불편함과 부딪힌다. 이러한 가능성 감각의 마찰에서 속상함이 다시 등장한다. 다시 설명하자면 가능성의 부재의 감각과 가능성의 감각들의 마찰에서 속상함이 등장한다는 뜻이다. 이는 마케팅과 절멸게임 속에서 우리의 속상함을 위해서 마케팅이 고생했던 구걸이라던가 대리함 등의 무용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나 실로 속상함의 진면목은 이 안에 속해있었던 것이다.
유투브 영상, 도망치다가 돼지용 크레인에 붙잡혀 잔인하게 울부짓는 똥지리는 돼지. 댓글에서 사람들은 그래도 돼지고기 맛있게 먹었죠? 라고 한다. 질투. 죽는 존재에 대한 질투와 부끄러움. 마케팅하는 존재에 대한. 예를 들어 퍼리들은 반대의 방향으로, 자신 몸안에 있는 동물을 뒤집어내는 것으로 이 부끄러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유명한 인물들이다.
또는 미친 빼앗가가는 사람들 대신 미친 기부자들,기부마들, 이타인들, 배려자들, 정신나간 보호자들, 정신나간 상기된 들뜬 주는 사람들. 차 완충용 인간, 반쯤 죽은, 은빛 피부를 갖고 있어서 잠시라도 누워있으면 욕창이 생기는 사람들.
복수의 날이 오고, 속았던 내가 잘못했다. 동의를 한 내가 잘못했다. 내가 멍청했다.
삼켜라, 깨물어라.
아무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단순한 윤리의 번역이, 죽음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속상함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디에서 누구와 보초설지.
아주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결국 마케팅의 복수는 마케팅의 과정에 내재해 있고, 언마케팅, 우리의 속상함 구조를 드러내어 흘러내리게 하는 일로 마무리 될 것이다. 언마케팅이란 이런 것이다. 단순히 서술하는 것.
거기에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일어났고,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